인프랩
지난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 대신 취업을 선택했던 이유를 많이 되돌아봤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실제 경험을 쌓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물론 때때로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느낄 때면 불안해지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에 있든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올해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며 정리해본다.
온라인 강의셀
올해가 시작하는 1월부터 플레이어셀에 (현 온라인 강의셀) 합류하며 업무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 작년에 어떤 식으로 일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셀에 속해서 협업하고 기여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게 많이 적응된 것 같다. 그런 차이 때문에 왠지 작년은 회사에 적응하는 데모 기간이었던 느낌이다.
퀴즈, 요약, 강의 제작 간소화 등 스프린트에 참여해서 기능을 구현하고 QA하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기능의 목적이나, 의미, 지표, 성과를 논의하는 셀 회의에 참여해서 내 역할은 뭘지 고민하게 된 것도 큰 변화였다. 이제는 데브옵스 파트에서만 있을 때보다 제품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직관을 사용해서, 또는 데이터를 조사해서 기능의 필요성을 미리 생각하고, 기능을 만들면서는 어떤 데이터를 쌓고 어떤 데이터를 주시해야할지 계획하는 PM 분들의 모습이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그런 방향의 고민은 내가 잘 모르고, 못하는 영역이고, 엔지니어인 내 생각과는 먼 영역의 고민도 많이 하시는 듯 해서 느껴지는 다름이 있었던 것 같다. 소프트웨어 서비스 개발이란 참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구나 싶었다. 생각의 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답이 있는 일도 아닌듯 한데 내가 어떻게 해야 종합적인 방향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좋은 제품이란 어떤 느낌이어야할지? 그런걸 만드는 회사는 어떤 방식으로 고민해야할지? 아직 나한텐 막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아직 인생 경험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스프린트 외적으로는 온라인 강의셀로서 재생 오류율을 줄이기 위해 트랜스코딩 및 재생 옵션을 조사하는 작업, 그리고 인코딩 파이프라인의 안정성/비용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Argo Workflow를 적용하는 작업. 또 자막을 arm 환경으로, 더빙을 TTS 모델 직접 실행 방식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었다. 그리고 자막 번역 및 줄바꿈 품질을 높이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했다. 닥치는대로, 강한 당위성을 느꼈던 일 위주로 해결해왔다. 영상 도메인이라 시도 가능한 일을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점에선 개인적으로 좋았다. 재생 오류 관련한 개선은 같은 셀원인 록, 럭끼, 프레디 그리고 제이크도 열심히 대응하고 조사해주셔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스프린트 외의 작업들도 많이 하다보니, 셀 회의에 참여하면 프론트엔드, 백엔드 개발자 분들처럼 서비스 기능을 직접적으로 개발하는 위치가 아니라서 완전히 몰입하기 힘든 지점이 있었다. 온라인 강의셀의 구성원으로써도, DevOps 파트의 구성원으로써도 단위 팀의 주요 주제에 대해 큰 그림을 향하는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느낌보다는 다른 분들과 분리된 개인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회사적으로 지금의 운용이 효율적인 지점도 있다면 나도 우선은 앞으로도 지금 상황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것 같다.
데브옵스 파트
조슈아와 제이크가 퇴사하시면서도 DevOps 파트와 DevOps 팀원으로서의 내가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 더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1월에 온라인강의셀 합류한 후로는 VOD, 자막 번역/더빙 파이프라인 관련해서 제이크와 가깝게 협업 했으니 변화에 대해서 생각할 부분이 더 있었다.
인프랩의 DevOps 파트는 SRE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여러 기술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 팀이라 생각한다. 그런 특성의 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분들이 계셔서 그렇게 된건지 전후 관계는 모르겠지만, 선비와 제이크가 그에 맞게 엄청난 화력의 엔진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고 느꼈다.
솔직하게 어떻게 저런 식으로 훌륭한 output을 계속 뽑아내시는거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평소 대화나 토의하시는 모습에서 다들 깊고 다양한 기술적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PostgreSQL, MongoDB를 다루는거나, CloudFront, Athena 같은 AWS 기능의 적용 방식들, LLM 황용이나 AI 모델 기반 기술 등 내가 몰랐던 부분을 1년간 많이 배웠다. 깊게 파보는 것도 파보는 거지만 발산적인 응용 방법들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두 분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선비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에, 제이크는 현재 실행 가능한 방법을 추진하는데 더 강점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두분이 대화하시는 것도 꽤 많이 주워들었던.. 것 같다. 추상적으로 돌아보면 추진력을 받쳐줄 환경을 원하신다는 점은 동일한데 주장하고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서 그렇게 느껴졌던 것 아닐까 싶다.
제이크가 시도하고 고민하셨던 부분을 들으면서 내가 감히 모든 부분에 공감할 순 없었고 그래서 죄송한 마음도 많이 들었다. 아무도 지시하지 않은 일을 찾아서 하고, 의욕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며 굴러가는 구조에서 효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더 고민하게 되었다. 제이크는 이상을 강하게 상상하고 구상하고 추진해나가는 걸 잘 하는 분이었는데, 미래를 믿고 목표가 있다는 기분, 회사의 목표 달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기분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질적인 계획이나 실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지 못하면 의미가 옅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향을 받은 만큼 기술적 역량이 필요한 도전적 일들을 시도하면서 내가 회사에 기여할 영역을 잘 쌓아가는 것이 응당 계속해나가야할 일들인 것 같다. 앞으로도 긴장과 생각을 늦추지 않고 나도 팀의 추진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한다.
본인
작년엔 회사에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입력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노력만 했다면 올해에는 나의 출력을 어떻게 만들어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 같다. 스스로 의견을 정말 꼭! 내야할 때가 아니면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생각을 계속 출력해야 다른 분들과의 대화로서 더 진전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언어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장점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절한 스몰톡의 중요성도 있는 것 같고 말이다..
하지만 내게 출력이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나만의 생각이 표출 가능할 정도로 형성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기술적 깊이, 지식의 면에선 당연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하고, 그 외의 복합적인 화술과 양분을 쌓기 위해서는 항상 목표하는 것처럼 독서를 놓지 않으려 했다.
세어보니 35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 1월: 구글 엔지니어는 이렇게 일한다, 지능의 기원, 촘스키&스키너:마음의 재구성
- 2월: 악마와 함께 춤을, 불멸,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 3월: 사람을 안다는 것
- 4월: 무지의 즐거움, 반항하는 인간
- 5월: 키르케고르 평전
- 6월: -
- 7월: 조건 없는 대학, 마르크스의 유령들, 호밀밭의 파수꾼
- 8월: 이세돌 인생의 수읽기, 과학 혁명의 구조,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천국에서 지옥까지
- 9월: 실패를 통과하는 일, 왜 미래는 남에게만 보일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 10월: 면도날, 습관에 대하여, 시여 침을 뱉어라, 이와타씨에게 묻다, 케인스를 위한 변명
- 11월: 소크라테스의 변명, The Seven Basic Plots, 삶을 바꾸는 질문의 기술, 독일어 시간, 닫힌방
- 12월: 인간이 인간을 죽일 때, 메논, 무의미의 축제, 위대한 개츠비, 독기학설
책을 읽으면 책의 낯선 상황에 내 생각을 비춰볼 수 있는 것 같다. 평소라면 안 했을 다양한 사유를 해볼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걸 읽을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도 쉽게 돌아볼 수 있다는 면에서 유익했다. 하지만 독후감을 안 썼던 책들은 내용이 비교적 흐리게 남긴 해서 아쉽다. 내년에도 독후감을 가능한 많이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생각이 가장 복잡해졌던 시기에는 수학이랑 암호학, 블록체인 공부도 했다.
- 대학수학 책을 중고로 사서 반 정도 풀었다.
- 정수론, 확장 유클리드 호제법, 오일러 피 함수 등 분류의 백준 문제를 몇 개 풀었다.
- 리얼월드 암호학,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비트코인, 마스터링 블록체인을 읽었다.
- 테스트넷에서 거래도 해보고, erigon이라는 이더리움 클라이언트에 기여도 몇 번 했다.
좋게 표현하면 건전한 취미고 나쁘게 표현하면 현실 도피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유익한 양분이 되었다고 느끼는 건, 기본적으로 접하는 암호학 기술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된 점. (GPG, PKI, ECDSA, RSA 처럼 어디선가 들어본 것들) 그리고 블록체인의 세계를 이해하며 현금이 흐르는 경제의 한 부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는 점이다. 특히 블록체인으로 구현된 암호화폐도 달러, 엔화, 원화 등 국가에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화폐처럼 하나의 화폐로써 가치를 지니는 게 신기했다. 국가는 국가의 힘과 경제 능력 등이 화폐 가치에 영향을 끼친다면, 암호화폐는 화폐가 관리되는 기술적 신뢰도가 가치를 쌓는다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다.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닦고 관심가는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걸 공부를 도피처로써 사용하는 게, 모든 걸 내려놓는 데 비해선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업무나 회사에도 도움되는 방향의 실용적 탐구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적어놓고 보니 올해에 실천한 것과 반대로 외부 활동을 해보는 방향도 생각해봐야겠다 싶다.
앞으로
사회란 정신없고 나라는 개인은 작은 존재인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일에 충실하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정도인 것 같다.
언젠가 연결점이 생기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