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똑똑한 내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하자. 그 잘난 과학수사를 했더니 ‘혈중알코올 농도가 0.1%나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바람에 일산화탄소에 중독된 줄도 모르고 죽었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내 ‘착한 아들’이 죽을 이유로는 그것이 타당하지 않아보인다. ‘내 아들의 등골을 빼먹던 며느리가 내 아들의 생명보험을 들어두고는 매일 일부터 술을 권해서’ 그랬거나, ‘내 아들의 성공을 질투하던 친구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일부러 환기를 안하고 있는데, 그 집 아버지가 검찰과 친구라서 사건을 덮은’ 이유라거나. 아들을 잃은 부모에게는 사실을 말하는 과학수사보다 이런 식의 음모론적 스토리텔링이 더 그럴싸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야 허무하지 않고, 그래야 누군가를 탓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라는 당위로 사건을 끝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느껴진다면 그 논리가 나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 떄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거듭되는 불운에 갈 곳 없는 분노를 견디는 대신, 나를 방해하는 악당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 삶의 고통을 설명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어야만, 그리고 거기에 무슨 의도나 의미가 있어야만 삶의 우연성에 허무해지지 않을 수 있다. 스토리텔링에서의 개연성이란, 인간이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추구하는 당위적 질서이자 인과의 법칙이다.
또 우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같은 생각과 예측 가능한 행동만 하는 인물이 있다면 지루하고 매력없게 볼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해도 공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은 ‘왜 인물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호기심이 생기고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 스토리텔링은 아는 맛의 결핍에서 시작할 때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준다. 인물이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이유는 빈칸, 즉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이야기 창작은 ‘어떤 결핍을 어떻게 내 방식대로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야기의 설정은 우리 모두가 이해하는 결핍에서, 조금 더 강하게, 좀 더 극적으로 설정될 수 있다. 결핍이 짐작되는 주인공이라면, 우리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결핍이라면, 심지어 우리가 겪은 것보다 더 깊고 아플 것으로 짐작되는 결핍이라면 독특한 선택을 해도 이해할만하다고 여기게 된다.
스토리를 다루는 The seven basic plots라는 책이 떠올라 흥미가 생겼다. 내가 보고, 영향받는 다른 이야기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그리고 왜 공감하게 되는지 좀 더 이해하게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