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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의 대화편 네 편을 읽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을 다룬 세 편(변명, 크리톤, 파이돈)과 사랑에 관한 향연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에,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결국 플라톤이 그려낸 소크라테스다. 그럼에도 이 대화편들을 통해 한 철학자가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변명(Apologia)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이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새로운 신을 믿는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보다, 자신이 왜 철학적 삶을 살아왔는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고 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이를 의아하게 여기고 그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한 결과, 그는 자신이 지혜로운 이유를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한 걸음 앞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의 지’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태연했다. 죽음이 무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어쩌면 죽음은 깊은 잠일 수도 있고,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은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크리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오랜 친구다. 그는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제안한다. 돈도 준비했고, 다른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다 마련해두었다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거절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국가의 법에 따라 교육받고 살아왔으면서, 그 법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때만 어기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법이 부당하다면 설득을 통해 바꾸려 해야지, 개인의 편의를 위해 어기면 안 된다. 법을 어기고 도망치는 것은 국가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이 평생 주장해온 정의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크리톤이 제시하는 현실적인 이유들(친구들의 명예, 자녀 양육 등)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단호하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며, 잘 산다는 것은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파이돈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마지막 날의 대화를 담고 있다. 친구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철학자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철학자는 육체의 쾌락에서 벗어나 영혼으로 진리를 탐구하려 한다.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므로, 진정한 철학자라면 이를 환영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을 주장하며, 대립물의 생성, 상기설, 영혼과 이데아의 유사성 등 여러 논증을 제시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존재했다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존재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담담하게 독배를 마신다. 친구들이 울자 그는 오히려 그들을 진정시킨다. 마지막 말은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갚아주게”였다. 병을 치료하는 신에게 감사를 표한 것인데, 어쩌면 삶이라는 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향연

향연은 앞의 세 편과 분위기가 다르다. 술자리에서 에로스(사랑)에 대해 각자 연설하는 형식이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이 차례로 연설하고, 마지막에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배운 것을 전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재미있다. 원래 인간은 둥근 형태로 팔다리가 네 개씩이었는데, 제우스가 인간의 힘을 두려워해 반으로 갈랐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사랑의 갈망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것인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여성에게 배운 에로스론을 소개한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에로스는 결핍이고 추구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 안에서 출산하고 싶어하며, 이는 불멸에 대한 욕망이다. 에로스의 사다리를 오르며, 개별적인 아름다운 육체에서 시작해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의 이데아에 도달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네 편의 대화를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소크라테스의 일관성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실제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의가 중요하다고 했고, 불의한 방법으로 살아남기를 거부했다. 검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하고 탐구했다.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이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플라톤이 이상화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삶의 모델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나는 검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철학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소크라테스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몸소 보여주었다.